앙리 루소 (Henri Rousseau)- 프랑스 최고의 사실주의 화가
"이국의 낯선 식물을 볼 때면 나는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앙리 루소는 한때 자신을 프랑스 최고의 사실주의 화가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종종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루소라는 이름 대신, 세관 사무원이었던 그의 직업을 내세워 '르 두아니에'라고 불렀다. 그러나 말년에 들어서 루소에 대한 대중들의 평가는 점차 호의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런 평가는 그의 사후에 더욱 강해져서 오늘날 그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2005년부터 2006년에 걸쳐 루소의 회고전이 파리와 런던, 워싱턴에서 차례대로 열렸다.
1860년에 학교를 그만둔 루소는 1868년까지 파리에 거주하며 시의 하급 공무원으로 일했다. 그는 40대 초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자연보다 나은' 스승이나 교육은 없다고 단언했다. 루소의 가장 뛰어난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정글의 야생 동물과 울창한 수풀로 가득 찬 이국적인 자연을 재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장면은 모두 그의 실제 경험이 아닌 상상으로 그린 것이었다. 왜냐하면 루소는 태어나 단 한 번도 프랑스를 떠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이러한 주제들을 묘사하기 위해 파리의 자연사 박물관과 식물원, 동물원을 수없이 자주 찾았을 뿐만 아니라 세심하게 고른 인쇄물과 사진집 등을 참고했다. 1895년까지 루소는 십년 동안 앵데팡당전에 해마다 최소한 한 작품씩 출품을 했는데, 그의 작품들은 어느 정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는 했지만 거의 팔리지는 않았다.
1907년에 루소는 화상인 빌헬름 우데와 화가인 로베르 들로네를 알게 되었다. 들로네의 어머니는 루소에게 <땅꾼>(1907)을 그려줄 것을 의뢰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많은 미술가들이 루소를 친구로 받아들이고 그의 영향력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젊은 미술가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들로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 콘스탄틴 브랑쿠시 등을 꼽을 수 있다. 3년 후 루소는 <꿈>(1910)을 앵데팡당전에 출품하여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이로써 그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성공을 살아생전에 맛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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